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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청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설경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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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청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설경 보유자.

 

황하청  

 

정의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설경 보유자.

 

내용


황하청(黃河淸, 남)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가정동 39번지에서 태어났다. 실제 생년월일은 1920년 3월 9일(음력)이지만 호적상에는 1922년 3월 9일로 등재되었다. 충남 대덕군 탄동보통학교 4년 졸업 후 서당에서 3년 수학하였다. 황하청은 서당 수학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풍수지리를 배우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18세 되던 해, 당대에 법사로써 명성을 떨쳤던 민영태 선생이 동네에 들어와 병든 사람을 고치기 위해 경을 읽었다. 그 당시 민영태 선생은 40대 후반 정도의 나이였으며 삼도(충정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유명 법사였다. 그러면서 민영태 법사황하청이 사는 이웃 마을 유성면 구성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민영태 법사가 경을 읽은 후 병든 사람이 완쾌되었다. 황하청은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하청은 집안에 무속인이 없었지만 법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민영태 선생에게서 무업을 배우려고 선생을 찾아갔다. 민영태 법사는 무업 은 배우다 그만두면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황하청은 좌절하고 않고 다시 선생 집으로 찾아갔다. 두 번 거절당한 후, 세 번째 찾아 갔을 때 제자로 받아 주었다.
황화청은 민영태 법사 밑에서 무학습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스승을 그냥 따라 다녔다. 당시는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해 가면서 굿을 다니는 선생을 따라 다녔다. 굿을 따라 다니면서 스승이 굿을 하면서 신령과 대화하는 것을 보고 황하청은 더욱 무속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무업을 배우는 순서는 먼저 병택(병굿)과 안택(안택굿) 이었다. 스승 민영태 법사는 경문의 내용을 자필로 써서 제자 황하청에게 주었다. 집에 돌아와 혼자서 열심히 연습하곤 하였다. 그리고 굿일이 없을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스승의 집으로 갔다. 황하청이 스승을 따라 다니면서 무업을 거들고 배우고 하는 세월이 5년이 흘렸다. 스승 민영태 법사황하청의 사람 됨됨이와 무학습에 임하는 태도 그리고 무업에 관련된 설경제작 및 경문 고장 등의 기술을 점검하고 흐뭇하였다. 황하청은 스승 민영태 법사의 기술만 열심히 익힌 지 5년 정도가 지나서야 혼자 굿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황하청은 선생을 일을 하게 되면 스승을 모시고 하였다. 스승 민영태 법사가 작고 하실 때 까지 황하청은 선생을 깍듯이 모셨다. 황하청의 스승 민영태 법사는 나이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스승 민영태 법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 황하청법사에게 설경 뜨는 칼 하나를 물려주었다. 당시 황하청 나이 40세 초였다.
스승 민영태 법사가 작고한 이후 황하청 법사는 스승의 무업을 이으면서 일가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황하청 법사의 설경과 경문 그리고 고장이 유명하다는 말이 장안에 알려지면서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안택굿 및 미친굿 보유자 신석봉 법사황하청 법사의 설경을 주문하여 사용하였다. 황하청 법사는 무속인 단체인 대한승공경신연합회 주최로 개최된 나라굿에서 그의 설경제작과 대전 앉은굿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대전 엑스포, 한밭문화제 등에서 그의 무의식을 선보였다.
황하청의 설경은 대전광역시 중구문화원에 보관되어 있고 대전사료관에서는 독립된 무속전시관을 마련하여 황하청의 설경을 전시하고 있다. 황하청 법사는 지역의 전통문화 계승에 크게 이바지한 결과로 1998년에 대전광역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황하청 법사는 1998년 11월 19일 사망전까지 약 200여명이 넘는 제자에게 신풀이를 하였다. 그리고 그의 굿문서를 학습한 제자는 대략 100여명 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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