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선
분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6호 독경(앉은굿) 기능보유자.
내용 최갑선(崔甲善, 남)은 1952년에 전북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서 출생했다. 최법사의 할아버지가 4대 독자였기 때문에 당시 신기(神氣)가 있었던 할머니가 시집와서 임피 취성산에서 자손 번성을 위해 백일기도를 올렸다. 백일기도 덕분인지 할머니는 남매를 낳았다. 그 후 최갑선의 어머니가 7남매를 두었지만 둘은 죽고 5남매만 남았다. 어머니가 자식 둘을 잃고 집굿을 하다가 어머니 본인에게 신이 내려서 그 후 본격적으로 무속 일을 하였다. 어머니는 그 당시 지역에서 꽤 용한 점쟁이로 이름이 났으며, 선굿 무당으로서의 모든 용모를 갖추었다. 어머니에게 신이 내린 것은 할머니가 무속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아버님은 평범한 농부였다. 결국 신기가 있었던 할머니와 그 뒤를 이은 보살 어머니를 둔 최갑선은 어릴 때부터 무속 환경에서 성장한 셈이다. 최갑선 자신도 7살 즈음에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다리를 뻗고 앉아서 ‘통신(通神)’이라고 반복해 말하곤 했다. 최갑선은 이유 없이 몸이 아파서 초등학교도 2년이나 늦게 입학했다. 그 후에도 발가벗고 우물에 가서 물을 뒤집어쓰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종종 하였다. 지속적인 병치레와 비정상적인 행동 때문에 최갑선 본인을 위한 병굿을 자주 했다. 굿을 하여 문복(問卜)한 결과 당시의 법사들이 최법사에게 신(神)이 왔다고 하였다. 이렇게 잦은 병치레에도 최갑선은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었다. 당시의 어려운 경제적 이유와 병원이 장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6ㆍ17세 즈음에 중학교(군산 국중학교, 현 중앙중학교)에 입학하여 학교에 다니던 중 아파서 자주 쓰러졌기 때문에 종종 근처 만수병원에 실려 가곤 했다. 하지만 병의 원인은 알 수 없고 단지 몸이 약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결국 최갑선은 중학교 3년 졸업과 동시에 요양을 겸해 스님이 되고자 절(강원도 설악산 신흥사)로 들어갔다. 신흥사 도관스님 밑에서 3년을 있으면서 불목생활과 채봉생활 등을 하면서 예불 의식도 익혔다. 하지만 이 생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신기가 있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낙산사로 가서 그 당시 주지스님인 최원철 스님으로부터 차비를 만들어 집으로 들어갔다. 절에 있는 동안은 아프지 않았다. 귀가 후 27세에 고계숙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결혼 후 다시 아파서 그해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1년 정도 약간의 보수를 받고 처사생활을 했다. 1년 후 집으로 돌아와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에서 법사 일을 시작했다. 법사로서의 입문은 당시 군산의 대법사인 임피면의 채현묵 법사를 사사하면서이다. 채현묵법사에게 2년 동안 사사한 후에 대야의 한진석 법사 4년, 임피의 고길용 법사 3년, 익산의 최광식 법사 4년, 군산 경암동 최양수 법사 3ㆍ4개월, 군산 미원동의 박복선 법사 6개월, 군산 회현면의 박길산 법사 2년, 군산 옥구읍의 서두봉 법사 3개월, 김제 백구읍 정일환 법사 6개월을 일할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법사로서 익혀야할 현장학습을 했다. 최갑선 법사가 아홉 명의 스승 법사들을 사사한 내용과 기간 등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위에 언급된 아홉 명의 스승 법사들 중에 현재 최광식 법사만 생존해 있으며, 나머지 법사들은 모두 고인이다. 이외에도 최갑선의 부친 친구인 강도홍 법사로부터 문서·설경·위패서식 등과 관련된 책자를 7ㆍ8년에 걸쳐 얻어왔다. 또 박궁기 법사로부터는 주역, 택일 책, 상경, 대경 등의 문서만 가져다가 독학을 했다. 이와 같이 최법사는 당시 군산을 비롯하여 인접 지역의 대법사들로부터 앉은굿 법사 학습을 하여 지금까지 군산을 주 근거지로 법사 활동을 하고 있다. 최갑선은 법사로서 중요한 독경과 위패 등의 작성 시 필요한 한자를 옥구읍 향교에서 여름과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학습했다. 덕분에 그는 요즈음 법사 일 외에 서예작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1년 6월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6호 독경(앉은굿)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최갑선은 ‘대한민국 무형문화재 총연합회 이사’ ‘대한민국 무형문화재 총연합회 전북지회장’을 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