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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례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 위도띠뱃놀이 무녀 부문 예능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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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례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 위도띠뱃놀이 무녀 부문 예능보유자.

 

조금례

 

 

분야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 위도띠뱃놀이 무녀 부문 예능보유자.

 

내용


조금례(曺金禮, 여)는 위도띠뱃놀이의 주무(主巫)로서 조기잡이의 칠산어장으로 유명한 위도에 5일씩이나 큰 풍어굿을 할 때부터 참여해온 위도 지역의 유일한 큰 세습 무당이었다. 1917년에 태어난 조금례는 17살 되던 해 서울에서 무업을 하던 작은어머니와 함께 위도로 들어와 한평생을 위도에서 살았다. 조금례가 서울에서 살았던 지역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위도띠백놀이 예능보유자인 김상원은 조금례의 고향이 서울이고, 서울에서도 ‘관훈정’ 사람이라고 한다.
조금례는 본래 굿하는 법을 몰랐으나 중매로 대리의 신만준에게 시집간 이후 본격적으로 무업을 하였다. 조금례가 무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어머니인 신만준의 어머니 영향이 컸다. 대리 지역에서 ‘갈매기’라는 예칭으로 불린 세습무였던 시어머니의 이름은 전일녀였다.
처음 시어머니는 조금례에게 굿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례가 적극적으로 굿을 배우려는 모습을 보이자 위도띠뱃놀이는 물론 단골집에 굿이 있을 때마다 조금례를 데리고 다니며 굿을 가르쳐 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조금례가 목소리 청이 좋지 않았으나 여러 해 굿을 하면서 목도 걸걸해지고 긴 사설을 다 외워 훌륭한 무당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무업 일을 할 수 있을 때쯤 조금례위도띠뱃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원당제와 용왕굿 등 굿의 주무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금례는 굿판이 없을 때면 배를 부리던 남편을 도와 뱃일을 하다가 마을에 굿이 있거나 각 가정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늘 불려 다니며 굿일을 하였다고 한다.
1985년 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 위도띠뱃놀이 무녀 부문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조금례위도띠뱃놀이의 주무이기도 하지만 대리 마을을 담당하던 단골무녀였다. 조금례단골은 대리 마을뿐 아니라 당시 행정구역상 대리 마을에 속해 있던 전막리, 소리, 논금, 거륜도 마을도 포함됐다. 정초에 책을 놓고 이 지역 주민들의 신수를 봐주기도 하고, 아이를 낳을 때면 산신할머니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바다를 삶의 무대로 활동하던 주민들은 해상 사고가 있을 때면 조금례를 찾아 굿을 부탁하였다. 큰 배를 부리던 집에서는 출어(出漁)를 하기 전에 조금례를 불러 고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금례가 활동하던 시기에 위도 지역에는 각 마을에 여러 명의 무녀가 있었다. 진리 마을은 까오기와 보름새, 치도리 마을은 대판넘이(최명씨), 식도 마을은 조금례의 작은어머니가 각각 활동하였다. 조금례 무녀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조기 어업이 매우 활발하여 봄철이면 대리 마을에서 별신굿이 열렸다. 굿은 대략 4, 5일간 진행되는데 조금례는 다른 마을의 무녀들과 함께 별신굿판을 이끌었다.
신만준과 결혼한 조금례는 2남 4녀를 두었으며, 1995년 5월 24일에 사망하기 직전까지 장남 집에서 거주하였다. 조금례가 사망하자 대리 마을의 안길녀가 위도띠뱃놀이의 주무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안길녀가 죽은 이후 위도띠뱃놀이 세습무는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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